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진리에 봉사하는 뫼르소가 이방인처럼 보인다. 여기서 진리란?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쳐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합리화하고 ‘거짓말’한다. 카뮈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순수하고 진실된 자연인 뫼르소가 ‘거짓말’을 거부하다가 재판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받고 있는 대상은 윤리가 아니라 재판의 세계입니다. 재판의 세계란 부르주아이기도 하고 나치이기도 하고 공산주의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모든 어둠입니다. 뫼르소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 p.151
거짓말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기 위해 우리 누구나 매일과 같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이러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데 사람들은 관례대로 그에게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길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 진정하게 뉘우치기 보다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 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라는 이방인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 혹은 영악함, 부조리함을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뫼르소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 놓지 않은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절대에 대한, 진실에 대한 뿌리 깊은 정열이 그에게 활력을 공급한다.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을 ‘이방인’ 속에서 읽는다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 p.154
삶은 어떤 기나긴 재판입니다. 사방에서 꼬리표를 달려고 덤벼들고 천편일률적인 공식 속에 집어넣으려 하고 관습에 따라 단죄하려고 합니다. ‘재판하지 말라’ 라는 계명은 법정들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재판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뫼르소는 마리에게도 재판관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과장해 불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간결한 표현과 완서법이 특징인 인간입니다. 그가 파멸하는 건 웅변적인 수사를, 어떤 언어상의 낭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 p.175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그때그때의 일상을 즉흥적으로 영위한다. 그의 삶은 타자의 이해와 무관한, 아니 이해 이전, 언어적 표현 이전의 자연인의 삶이다.
반면에 살인 후 재판을 받게 되면서 그와 그의 행동들은 타자의 이해, 해석의 대상이 된다. 법정은 한사코 그의 인간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행동의 동기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의 행동, 심리적 동기, 인간성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매달림으로써 오해에 기초한 그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1부가 뫼르소의 눈을 통해 본 개인과 사회생활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묘사라면 2부는 타자의 눈을 통해 보이는 뫼르소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그 그림은 동시에 재판에 대한 비판적 회화로 작용한다. - p.212
그 결과 전반부와 후반부에 있어서 뫼르소와 법정을 바라보는 독자의 태도가 달라진다. 전반부에서 독자는 우선 주인공의 기이한 태도에 당황한다. 그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뫼르소가 순수해 보이므로 그에 대하여 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2부에서 독자는 뫼르소가 자신의 운명에 무심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리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독자 스스로 살인범인 그의 편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결과 부지불식간에 뫼르소는 일종의 순교자로 변하여 법정의 희극성을 풍자하고 공적 사회를 고발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 p.212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진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뫼르소의 모습을 보며 대학원 첫학기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생각났다. 조르바는 순수하고 자유롭게, 내일 죽어도 상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한다. 뫼르소와 마찬가지로 조르바의 행동 역시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
(당시 썼던 글의 일부분)
소설에서 조르바는 Carpe diem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철저하게 현재에 집중한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삶의 초점에서 완전히 비껴나있다. 이 극단적이고 독특한 삶의 자세는 조르바에게 ‘자유’와 ‘통찰’을 선물했다. 조르바는 얼핏 보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달로 보인다. 그러나 조르바는 종종 ‘나'와 독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통찰을 발휘하며 보통 건달과 차별화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조르바의 통찰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뫼르소와 조르바 모두 ‘우리 모두 죽기 때문에 삶은 본질적으로 덧없다’는 진리를 내재화했다. 인간 사회가 만든 온갖 의미부여와 해석 (= ’거짓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살아가자. 얼마 전에 읽었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도 이어진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미지’를 본다. 그 ‘이미지’는 ‘생각’이 만들어내고, ‘생각’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아는 것’이란 우리가 의존하고 있지만 보통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관습, 문화, 교리, 사상, 이론, 원칙, 신념 등을 뜻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통해 사물을 평가하고, 정의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
‘아는 것’들은 모두 과거의 산물이고, 따라서 ‘생각’ 역시 과거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에 산다. ‘아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p.201
미래의 저 바닥으로부터 불어오는 ‘어두운 바람’은 뫼르소의 의식 속에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이 모든 가능성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평준화한다. 어머니의 죽음부터 사형 선고에 이르는 동안 이 ‘어두운 바람’은 여러 곳에서 암시처럼 불고 있었다. 이처럼 텍스트의 암시적 지표 속에 숨어있는 ‘죽음’은 ‘이방인’ 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지탱하는 창조적 충동으로 작용한다. - p.227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쳐해져 있는 것이다 .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삶이기에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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