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헤세의 내면 탐구 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의 마지막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석가모니의 삶을 모티브로 우리의 삶에 대한 헤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 싯다르타의 삶은 phase 1, 2, 3, 4, 5로 나눌 수 있다.
- 부모님과 함께한 브라만 시절
- 고빈다 (친구)와 함께한 떠돌이 수도승 시절
- 카말라 (연인)와 함께한 부자 시절
- 아들과 함께한 뱃사공 시절
- 비로소 모든 것에서 떠나 홀로 우뚝 선 완성자 (깨달은 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바뀔 때는 확 바뀐다. 그럼 사람은 언제 바뀌는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싯다르타 역시 각 phase의 끝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음 phase로 넘어가면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이번 phase에서 쌓인 독이 터짐 →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 깨달음이 찾아옴 → 다음 phase 시작
소설 속에서 싯다르타는 매번 위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단계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독
독은 왜 쌓이는가? 작년에 쓴 글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독이란 두려움, 불신, 자괴감이다.
- 독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원하기에 생긴다.
-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데, 그걸 얻기에 내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면 독이 쌓인다.
뭐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싯다르타를 읽고 나서 다시 보니 뭔가 부족하다. 그 땐 몰랐지만 싯다르타를 통해 독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원한다고 무조건 독이 쌓이지는 않는다. 그 무언가가 우리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을 때, 독이 쌓인다.
얻고 싶은 게 외부에 있으면 외부의 장단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외부의 소리는 열심히 듣고 내부의 소리에는 귀를 닫는다. 그럼에도 내 마음 대로 안 된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 나의 외부에 있으니 당연히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누구나 처음 골프를 배울 때는 허우적댄다. 힘은 많이 들어가는데 공은 제대로 안 맞는다. 이 때 ‘골프를 운동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사람과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골프를 배워서 부모님의 기대에 만족하고 싶다‘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스트레스를 받을까? 누구에게 독이 쌓일까?
위 예시에서 ‘부모님의 기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의 소리에 집중할수록 점점 내 안의 소리와 멀어진다. 그러면 마음은 ‘내 이야기 좀 들어줘!’ 하면서 불만의 표시로 독을 쌓는다. 그러다 독이 과하게 쌓이면 ‘넌 평소에 나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지’ 하면서 마음이 파업한다. 몸에 안 좋은 음식, 안 좋은 행동이 누적되면 몸이 파업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소설 속 구절
서서히 그는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고빈다와 작별한 후 시작했던 싯다르타의 새로운 삶도 낡아 빠지게 되고, 얼룩과 주름이 쌓이고, 환멸과 역겨움이 그 밑바닥에 숨은 채 여기저기에 이미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예전에 자신의 내면에 깨어있던, 찬란한 시절 매번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그 밝고 확실한 음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닫고 있었다. - p.114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일, 그러한 삶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 스스로 자신에게 죄업을 짊어지게 하는 일, 스스로 쓰디쓴 술을 마시는 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일. 그런 일을 못하게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길이 혹시 당신 아들한테는 면제되어 있는 게 아닐까,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번뇌, 고통, 환멸이 면제되어있길 바라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믿는 겁니까? 아쉽지만 설령 당신이 다들 대신 10번 죽더라도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 만큼도 덜어줄 수 없을 겁니다. - p.174~175
사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홀딱 빠져서 자신을 몽땅 바칠 수도, 자신을 망각할 수도, 사랑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 당시 그는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었으며, 이 점이 자기와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구분하는 커다란 차이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들이 나타나고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어떤 사랑에 빠져버리고,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 - p.176
마음의 소리
그러면 쌓인 독을 어떻게 해독하는가? 소중하게 대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니 소중하게 대하면 된다. 듣지 않아서 생긴 문제니 들으면 된다. ‘자기인식을 높이고, 내면을 깊이,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6개월 전에 내가 쓴 글에서 독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이야기했고, 여전히 유효하다.
내면을 마주하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어리석고 나약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찾아오는 현타. 후회. 공허함. 절망감. 방황. 이 모든 고통을 겪어야만 해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솔직한 자문자답과 내면 탐구의 시간을 거치면서 독은 점점 사라진다.
하지만 독이 쌓인 내면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건 고통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조바심에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 괴로움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밖에서 찾고, 자기합리화에 빠지는 것이다. 도피는 보통 이런 행동으로 나타난다.
-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을 남에게 던지기 - 누가 대신 답해줬으면 좋겠다 😥
- 방어 기제 작동, 자기 기만하기 - 내 안의 나약한 모습 마주하기 싫어 😥
이렇게 잠깐 도피하더라도 결국 문제는 반복된다. 고통을 감내하고 충분히 괴로워해야 해결된다. 소설에서도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있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아 해결이 안 된 일체의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며, 똑같은 고통을 언제나 되풀이하여 겪게 되어 있는 법이다.
소설 속 구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껴 공중에서 흩날리다 나풀거리며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존재야.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숫자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별 같은 존재로서 고정불변의 궤도를 따라 걸으며, 어떤 바람도 그들에게 다다르지 못하지.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그들 나름의 법칙과 궤도를 지니고 있지 (= 고타마)
고타마를 따르는 수천 명의 제자는 날마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규율을 따르지만, 모두 떨어지는 나뭇잎과 다를 바 없어. 그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가르침과 법칙을 갖고 있지 않아. - p.108
싯다르타는 자기를 이 장소까지 오게끔 만든 욕망이 어리석다는 것을, 자기가 아들을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아들에 집착하고 애착을 느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욕심에 찬 목적의식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공허한 마음이 들어서 있었다. 그는 자기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으며, 공허함을 느꼈으며,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더 이상 아무런 기쁨도, 목적도 보이지 않았다. - p.183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진 않았을까?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은 한 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그런 것이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아 해결이 안 된 일체의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며, 똑같은 고통을 언제나 되풀이하여 겪게 되어 있는 법이다. 싯다르타는 절망적인 마음 상태가 되어 자신과 온 세상에 대해 큰 소리로 비웃어 주고 싶은 생각을 적잖이 하면서 오두막으로 되돌아왔다. - p.190
깨달음
소설에서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순간마다 ‘옴’을 듣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마음의 소리’로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이센스가 ‘독’에서 반복하는 구절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의 ‘잃어가던 것’이 바로 ‘마음의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괴로움과 방황 끝에 다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외부의 장단에 따라 춤추던 과거의 어리석은 모습에서 벗어난다.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과거의 나와 이별한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
결국 깨달음이란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내면에는 ‘미래의 나’의 모습이, 깨달음을 얻고 새로 태어날 ‘새로운 나’의 모습이 이미 있다.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뿐.
소설 속 구절
'나는 정말로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며, 나는 이제 더 이상 고행자, 승려, 바라문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정말이지 다 지나간 일이고, 이 모든 일은 이제 더 이상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싯다르타는 서 있었는데, 숨 한 번 쉴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 p.64
소년 시절 들었던 것과 똑같은 내면의 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떠나거라! 떠나! 너는 소명을 받은 몸이니라!” 정든 고향, 사문, 고타마로 벗어나 불확실함으로 빠져 들어갈 때마다 싯다르타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보다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여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높은 목표도, 갈증도, 향상도 없이 자그마한 쾌락에 만족하면서도 결코 흡족하지 못한 채 헛되이 보낸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 p.122
결국 내가 또다시 어린애가 되어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악덕, 오류, 구토증과 환멸의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었어. 나의 마음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어.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가장 어리석은 생각 (자살)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어.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꼬불꼬불할 수도,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 p.140
너무 많은 지식이, 성스러운 구절이, 제사의 규칙이,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으며, 학자나 사상가, 사제 아니면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교만한 마음속으로,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아가 파고들어 와서는 단단히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동안, 단식과 참회로서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런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 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자기는 계속하여 그 가증스런 세월을 견뎌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구토증을, 그 공허감을, 황량하고 길을 잃고 타락한 인생의 그 무의미함을 견뎌 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으며, 쓰디쓴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탕아 싯다르타도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싯다르타는 이제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 p.144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결론: 삶이란 내 손으로 직접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 위해선 경험해야 한다. 경험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평가, 의견, 가르침 모두 참고만 할 수 있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는 없다. 스스로 경험하고, 괴로워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내 안에 숨어있던 위대함이 나타난다. 9년 전 화학과 7학기까지 다니고 마지막 학기에 휴학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했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 생각)
화학과에서 A+ 한 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3학년이 끝날 때까지 이루지 못했어요. 화학 덕후, 소위 화덕이라 불리는 애들이 다 쓸어갔거든요. 그러니까 졸업은 1년 밖에 안 남았는데 현타가 옵니다.
왜 얘네들이랑 경쟁하고 있나? 질 수 밖에 없는 싸움 아닌가? 얘네가 나보다 화학은 더 잘 하지만, 다른 건 내가 더 잘 하는데? 화학으론 A+ 못 받아도 분명 다른 데서는 A+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한테 더 잘 맞는 게 분명히 있는데 굳이 또 의대 가서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막상 이제 그럼 뭐하지? 큰일 났다 싶은 거에요. 길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까, 정확하게는 다른 길을 제대로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나의 가치관과 능력을 알고 그걸 잘 살릴 수 있는 분야로 가면 잘 될 수밖에 없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데이터를 봐야 합니다. 내가 상상하는 나 말고 진짜 나를 알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결정을 했는지 말이죠.
위대함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내 안에 숨어있는 포텐이 터지려면 경험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 몬스터 에너지 캔에 적혀있는 ‘unleash the beast’가 떠오른다. 올 하반기에는 9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으면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삶에 큰 현타 찾아오고 읽으면 깊은 울림이 있는 책! ⭐
소설 속 구절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다른 가르침, 더 나은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서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아님 죽든가 하겠지요. - p.56
그 사실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군.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안 거야. 그 사실을 단지 기억력으로 아는 게 아니라 나의 두 눈으로, 가슴으로, 위로도 알게 되었어. 그것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로군! - p.143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지니고 다닐 수 있지만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나는 젊은 시절 이러한 사실을 예감했기에 스승들 곁을 떠났던 거야.”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은 ‘모든 진리는 그 반대로 마찬가지로 진리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즉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건 모두 일면적이고, 반쪽에 불과하며,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래서 세존 고타마께서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달리 어떤 방법이 없지.”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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